Jinon씨의 유학 시절 이야기를 읽고서, 저도 20살때에 런던에 가서 B&B(영국의 저렴한 호텔입니다) 방에서 TV만 봤던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저는 20살때에 대학교를 중퇴하고, 반 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돈을 들고서, 아무 목적도 없이 런던에 갔었습니다. 1989년의 일이에요.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네오 어쿠스틱이라는 음악을 좋아해서, 런던에서 생활하면 그러한 음악 관련 분야에서 일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런던은 상당히 냉혹했습니다. 우선 인종 차별이 있어서, 일반적인 영국인들은 전혀 저를 상대해주지 않았어요. 예를들면, 그러한 레코드를 팔고 있는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말을 걸어도 가볍게 무시당하거나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덧붙여서, 이 때의 경험을 나중에 되서야 일본에 살고 있는 영국인에게 이야기했더니 '일본도 같다고. 일본인도 인종 차별은 상당히 있어서, 내가 가게에서 서투른 일본어로 말을 걸더라도 다들 무시한다고'라고 들었지만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반에서 친해진 사람들이 동갑내기인 한국인 여성 2명이었어요. 이상하게도 지금도 선명하게 두 사람의 분위기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데요,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는 상당히 부유하게 고생 없이 자란듯한 인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런던의 펍에 가서 서로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는 영어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주변의 영국인들이 상당히 희한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도쿄가 진원지인 지진도 꽤 있나보네요. 제가 도쿄에서 겪었던 지진은 도쿄가 진원지였던 적은 그다지 없었던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러고보니, 3.11 동일본대지진이 있던 해의 여름에 도쿄에 갔었을 때 경험했던 지진은 그때까지와는 약간 흔들리는 것이 달랐던 느낌이 있었습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3.11 영향인가?'라는 느낌은 저에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RED HOT + RIO'의 아시아판은 실현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요즘 트위터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보사노바 스타일의 음악을 들어보면, 나라에 따라 그 색깔이 다른 것이 느껴져서 '그렇구나. 한국어로 부르는 보사노바란게 아마 외국인이 듣기에는 나랑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꿈으로 끝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겠습니다.
「RED HOT +RIO」のアジア版は実現できるように頑張りたいと思います。最近ツイッターでアジアの色んな国のボサノバスタイルの音楽を聴いてみると、国によってそのカラーが違うことに気付いて、「なるほど。韓国語で歌うボサノバってたぶん外国人が聴くと僕のような感覚になるかも」と思ったりしました。夢で終わらせないで、実現に向けてひとつひとつ階段を上がって行きます~!
한편, 코마츠 요우코씨의 인터뷰는 관심 깊게 읽었습니다. 제가 일본어를 배우러 도쿄에서 유학했을 때에 느꼈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많이 있어서, '그렇구나. 외국어를 공부하는데는 모두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음, 저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일본인과 만날때마다, 한국어의 어려운 점을 물어보는데요, 받침에 대해서는 그런 고민의 하나로 반드시 등장해요. 그리고, '이 한자는, 이 한글'이라는 법칙은 반대로 일본어를 공부할 때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휘가 늘어서 편해요. 한자의 읽는 법도 같은 내용이고요.
저는 세이부 신주쿠센(西武新宿線)의 아라이야쿠시마에(新井薬師前)역에 있는 모 일본어 학교에 1년간 다녔습니다. 학교에서는 초급에서 상급까지 있는데, 저는 중급 1에서 시작해, 중급 4까지 마치고 졸업했습니다. 대학원에 가려면 일본어 능력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일단 일본어 능력 시험 1급을 통과하자는 것이 설정된 목표였습니다. 뭐, 여러 사정이 있어서 통과하고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요. (웃음) 가끔 '어떻게해서 1급 붙은거야?'라고 질문을 받는데요, 저는 그다지 능력시험을 위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수험생에게 도움이 되는 비법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도쿄에 도착하고 3개월 정도는, 별다른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자 사전을 가지고 TV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게 저에게는 꽤 공부가 되었어요. 자막 이야기는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저는 TV 덕분에 1급을 통과하지 않았나해요. '헤이세이 교육위원회'와 '네프리그'(전부 후지TV네요)는 당시 매주 봤던듯 하고요. 음, 지금도 도쿄에 살고 있는 외국인에게는 추천해 드립니다. 일본인들의 감각으로 봤을 때는 어떤 느낌일련지는 모르겠지만요. (웃음)
학교 선생님들께도 일본에 대해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원 여성분들로, 다양한 분야의 경험을 거치고나서 학교의 선생님이 된 케이스가 많은 듯한데,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서 일본의 좋은 면들을 소개한다'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좋아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어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선생님들이셨어요. 국가의 좋은 이미지라는 것은 이러한 곳에서부터 만들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음, 공부에 대해서는 정말 일본어도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어렵지만요. 거의 매일이 시험의 연속이에요. 중급부터는 동사, 형용사등의 내용만이 아니라, 아무튼 한자의 읽는 법과 쓰는 법을 외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부터 탈락자가 늘어나는 시기에요.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갑자기 시험만 봤던 시기여서,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음, 입학하고 첫 수업 때였던 것 같은데요, 그 때 선생님께서 '언젠가 일본어로 꿈을 꿀 때가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렇게되면 일본인들이 말하는 일본어가 들리게 될거에요'라고 하신 조언을 믿고, 묵묵히 계속했던 시기였습니다. 3개월정도 지속하니, 정말로 일본어로 꿈을 꾸었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니 정말로 다양한 일본어가 들리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아, 맞다. 학교라서 소풍도 갔었어요. 매년 정기적으로 가는 후지큐 하이랜드! 졸업 여행도 갔었어요. 매년 정기적으로 가는 닛코! 저는 '우에노 동물원에는 안가는건가?'라는 분위기였지만요. (웃음) 스모나 가부키를 보는 기회도 있었는데, 학생 할인이라고 해도 꽤 비쌌기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돈으로 서점에 가거나, 중고 레코드점에 가거나, 라이브에 가거나, 카페에 갔던 생활이어서요. 당시는 12시반에 학교가 끝나면 나카노까지 걸어가서 시부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210엔이었던 듯한데요, 그게 학교에서 시부야까지 갈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습니다. 시부야에서 중고 레코드점을 들리고 나서는 다시 걸어서 곳토우 거리(骨董通り)에 가고, 거기에서 아오야마 1가(青山1丁目)까지 가서 오오에도선을 타고 당시 살고 있던 나카이라는 곳까지 가는 스타일이었어요. 당시는 이런 음악에 빠졌던 시기였습니다. 매일 걸으면서 들었어요.
음, 이 글을 적으면서 오랫만에 일본어 학교 홈페이지를 봤는데요, 예전 제 사진이 있어서 조금 웃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졸업식 사진만 있어서요, 일단 안심이 되었습니다. 엄청 심한 사진도 꽤 있던 것 같아서요. (웃음) 학교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파티가 열렸는데요, 학급별로 노래, 춤, 연극등의 발표회가 있어요. 그 때, 저는 뭔가 동물로 변장하고, 거기다가 날아가는 장면이 있어서, 그렇게 변장한채로 책상위에 엎드려 있게 되었습니다. 뒤에서 준비하고 있는 체격이 좋은 남자들에게 '밀어!'라고 말하고, 정말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던 기억이 있지만요. 그 사진은 없는듯해서 일단 안심이 되었습니다. (웃음)
잘 아시는 심벌즈에요. 지금도 봄이 오면 자주 듣는 곡입니다. 대학 시절에 처음 들었을 때는 '상쾌하구나~'하는 생각이었지만, 점차 이런 음악이 나오는 도시는 어떤 느낌일까라고 생각해서, 언젠가 도쿄라는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도쿄에 가서 라이브로 보자고 마음 먹었지만, 도쿄에 갈 수 있었을 때에는 이미 해체했었습니다. 여러 의미로 제 20대를 상징하는 곡이에요.
「RED HOT + RIO」のアジア版ってすごく良いアイディアですね。このブログを始める前はそんなこと、また夢の夢だったように思いますが、こういうことってただの夢で終わらせないで、実現に向けてひとつひとつ階段を上がっていけば、いつかは上手く行くんだって気持ちがして来ました。理想を持つって人間の一番良い面のように思います。
'RED HOT + RIO' 아시아판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네요.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건 역시 머나먼 꿈 속의 일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것들이 단지 꿈으로 끝나지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로 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을 가진다는건 인간의 가장 좋은 면인듯해요.
지난 3월 8일, 저희집 바로 근처가 진원지였던 지진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지진의 진원지가 정확하게 표시되는 인터넷 서비스가 있어서 그걸 봤더니 저희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인, 가끔 낫짱(제가 기르고 있는 강아지입니다)하고 산책하러 다니는 장소였어요. 그렇구나, 도쿄가 진원지인 것도 있구나. 그렇다면, 일본내 어디에 있어도 위험하겠구나, 라고 다들 모여서 얘기하고 있는 중이에요.
읽고 쓰는것은 어느정도 가능해졌지만, 한국인 선생님이 모두 원어민 실력으로 일본어를 잘 하셔서, 그 상황에 기대어버려서 회화가 전혀 늘지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먹고 한국에 어학 유학을 했어요. 귀국후에는, 자막 없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거나, 혼잣말을 한국어로 해본다거나, 가급적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려웠던 부분은 '받침'의 존재. 받침의 유무, 연음화가 되는지, 안 되는지로 단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듣고 이해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앞뒤의 문장으로 판단하던가, 들어서 익숙해지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아직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응'의 발음 (m,n,ng)과 격음, 탁음의 발음도 평생 익히지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쉬웠던 부분은, 역시 문법이 비슷한 점입니다. 처음에는 우선, 일본어로 생각했던 것을 한국어로 그대로 변환하면 OK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지금은 좌절할 듯 해요)
그리고, 단어에 한자어가 많아서, '이 한자는, 이 한글'이라는 법칙을 알게 되면, 어휘가 늘기 때문에, 편해요.
K : 서울에서는 신촌이라는 여러 대학교들이 모여있는, 소위 대학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홍대 어학당까지 걸어서 30분정도요.
오전중(9시~13시)은 학교. 오후는 자유라서요, 친구집에 놀러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주 2회, 일본어를 배우는 한국 학생과 스터디를 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TV를 보며 늘어진 다음에, 학교 숙제, 예습, 복습을 했습니다. 밤에는 가끔 삼겹살과 치킨을 먹거나, 술 마시러 가거나, 홍대 클럽에도 아주 가~끔 갔었어요.
K : 학교 생활 첫 날, 교실에 들어갔더니 책상 위에 누구건지 알 수 없는 마시다 만 주스캔이 올려진 채로 있던 것이 우선 충격적이었습니다. 일본이라면 공공 장소에서 그런 일이 별로 없으니깐요. '이게 한국인가~?'라고 그 놔두고 간 주스캔을 보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일본은 뭐든지 딱딱 정해진 것이 많고, 그것이 좋기도 하지만, 반면에 숨막히게 답답하기도 하는데요, 한국은 일본에서 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해도 전혀 상관없다던지, 처음에는 소심해서 '이거 괜찮을려나~?!'하면서 조심조심하고 있던 것도, 익숙해지면 그게 그냥 편하게 됩니다. 예를들면,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 전문점에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물만으로 몇 시간이나 있거나......라던가요 (범죄?). 노래방도 제한 시간내에 방에서 나가지 않아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요.
비슷한 점은, 비록 사용하는 고추가루와 마늘의 양은 다르지만, 음식은 닮아있는 점이 많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한국인도 일본인과 같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랄까, 일본인보다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공휴일도 압도적으로 적고요.
요즘 봤던 영화에서는 '건축학개론'이 좋았습니다. 삽입곡인 '기억의 습작'이 멋져요. 작년 한국에서 봤는데, 한국에서는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바로 극장에 조명이 밝아지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요, 저는 이 곡이 끝날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설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그냥 바로 나가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홍상수 감독입니다.
음악은 현재 인피니트에 완전히 빠져있는 중이에요. NELL과 장기하와 얼굴들, 페퍼톤스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설렁탕. 한국에 가면 다양한 가게의 설렁탕을 먹어요. 그리고, 부산에서 먹었던 호떡과 돼지국밥이 잊을 수 없습니다.
'기억의 습작'이에요. 혹시 몰라서요.
H;デザイナーの目から見て、韓国のデザインで感じること
K;韓国映画のポスターやパンフレットは、クオリティが高く、常に注目しています。
CDデザインも値段の割に、仕様が凝っていていつも感心しています。
あくまで個人的な見解ですが、韓国のデザインやアートは、日本より可愛いものが多いと感じてます。
H : 디자이너의 눈으로 본 한국 디자인에 대해서 느꼈던 점은요?
K : 한국 영화 포스터와 팜플렛은 퀄리티가 높고 항상 주목하고 있습니다.
CD 디자인도 가격에 비해서 공을 들인 것이라 항상 감탄하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지만, 한국 디자인과 미술은 일본보다도 예쁜것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